좋은 책

사랑, 예술, 정치의 실험
파리좌안 1940-50

아녜스 푸아리에 지음
노시내 옮김

마티, 2019

본문이 시작될 때까지 이 책이 가리키는 것이 무엇인지 그 방향과 배경을 소개하고 있는 부분이 흥미로운 사진과 지도들을 포함해 40여 쪽에 이르는데 이것만 보아도 흥미진진하다. 파리 센 강의 남쪽을 이르는 파라좌안에서 당대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책은 목차에 이어 서문인 ‘들어가는 말’이 나오기 전에‘파리좌안 연대기 1939-49’ ‘파리좌안의 장소들’ ‘등장인물’을 지도와 흑백사진으로 소개하고 있는데, 마치 2차 세계대전 당시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처럼 재미있고, 책 전체를 읽어나가는데 도움이 된다.
연대기는 “1939년 8월 23일  - 소련 외무장관 몰로토프가 독일 외무장관 리벤트로프와 불가침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히틀러의 서부전선 전력 집중이 가능해짐,”으로 시작하여 “1949년 11월 - 보부아르의 「제2의 성」2권이 출간되면서 스캔들을 일으킴.”으로 일단락되고 바로 옆에 카페 드 플로르의 사진이 있다. 1887년 즈음에 문을 연 이곳은 이 책에 등장하는 많은 예술가, 문인들이 드나들던 곳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책의 배경이 된 유명한 장소들은 모두 47곳으로 루이지엔 호텔, 사르트르의 거주지, 카페 드 플로르, 카페 레 되 마고, 피카소의 작업실 겸 거주지, 갈리마르 출판사, 소르본 대학교, 마셜플랜 본부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쯤 되면 등장인물 한 사람 한 사람 그리고 장소 하나 하나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을 품고 있을지 궁금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카페 레 되 마고 사진에 이어 소개하는 등장인물은 미국 작가 넬슨 올그런에 이어 파블로 피카소까지 29명에 이른다.
전쟁의 불온한 기운이 엄습하면서 이를 감지한 당시 루브르 박물관 관장 자크 조자르는 독일군이 파리에 도달하기 전에 박물관의 주요 소장품 4,000점의 대피 작업을 비밀리에 계획하고 지휘하여 완수했다. 책에서는 이 과정을 서술하면서 “조자르는 준비되었지만, 불행히도 프랑스군은 그렇지 못했다.”고 썼다. 전쟁 초기 프랑스가 겪어야 했던 고난과 치욕 그리고 전후 그곳에서 펼쳐졌던 수많은 사랑과 예술, 정치적 실험을 암시한 말이다. 프랑스는 나치에 항복한 대가로 런던 등과 달리 파리의 아름다움을 보존했으나, 투쟁하지 않은 ‘겁쟁이’가 된 파리의 젊은 층은 특히 심각한 정신적 패배를 겪어야 했다. 하지만 그 황폐함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도시는 빠르게 회복했고, 전후 정신적·문화적·사상적 재건에 ‘파리좌안’이 핵심적 역할을 했다. 특히 여성들은 경제적 자립과 낙태권 쟁취를 도모했고, ‘선천적 여성성’을 의심했으며 여성의 섹슈얼리티에 귀 기울였다. 또한 일대일의 독점 관계에서 벗어난 파트너십과 결혼·자녀·가족을 상징하는 ‘집’을 거부하고 호텔, 카페, 바를 거처로 삼는 생활 방식을 시도하였고, 개인의 실존에 천착하는 실존주의 철학이 큰 충격을 던지며 호응을 얻었다. 이처럼 파리좌안의 새로운 형식들로 ‘프렌치 스타일’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40년대 파리의 고민, 실천, 표현법이 당시 현실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자 한 시도였고, 지금 보아도 급진적인 면을 지니고 있으며, 유쾌하고 정열적인 활기로 가득 차 있었음을 느낄 수 있다. 무엇보다 지금은 모두 고인이 되었으나 일가를 이룬 거장으로 인류의 유산이 될 많은 저작이나 작품을 남긴 이들을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생생하게 묘사하여 당시의 분위기를 그대로 전달하고 있다는 점이 정말 커다란 미덕으로 다가왔다.
이 책 『사랑, 예술 정치의 실험: 파리 좌안 1940-50』의 저자  아녜스 푸아리에는 파리에서 태어나 런던에서 공부한 저널리스트, 방송인, 평론가, 작가이다. 프랑스 정치 주간지 《마리안》의 영국판 편집자이며 《가디언》, 《옵저버》, 《타임스》(런던), 《네이션》, BBC Sky News, CNN 등 영미 언론 매체에 정기적으로 기고하거나 출연하고 있다.

이 숙 현 편집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