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과 인생(198) | 영화이야기

부탁 하나만 들어줘

감독  폴 페이그
출연  블레이크 라이블리, 안나 켄드릭, 헨리 골딩

싱글맘 스테파니(안나 켄드릭)는 전업주부로서의 팁을 알려주는 브이로그를 운영하고 학부모 활동에도 열심히 참여하며 살아간다. 그러다가 아들의 친구 엄마인 에밀리(블레이크 라이블리)와 친해지며 늘 똑같기만 하던 스테파니의 일상이 조금씩 달라진다. 잘나가는 홍보대행사의 높은 직책을 맡고 있는 워킹맘 에밀리는 완벽하게만 보였다. 유명한 소설가 남편 션(헨리 골딩)과 여전히 뜨겁게 사랑하고 있으며, 누구라도 당장 빠져들 만한 매력적인 외모에 강렬한 카리스마, 사생활 노출을 극도로 꺼려하는 신비로운 면모까지, 에밀리는 스테파니가 가지지 못한 모든 것을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에밀리가 스테파니에게 자기 대신 아들의 하굣길 픽업 좀 대신해달라는 부탁을 남긴 채 사라지고, 며칠 뒤 호수에서 시체로 떠오른다.
길리언 플린의 베스트셀러 <나를 찾아줘>(데이빗 핀처가 영화화하기도 했다) 이후 여성이 주인공으로 전면에 나서는 스릴러, 남편이나 연인 혹은 가족 간에서 벌어지는 정서적/신체적 학대를 둘러싼 스릴러는 메인스트림의 한 갈래로 정착했다. 영미권에서는 이를 ‘가정(domestic) 스릴러’라고 명명했고, 가장 안전하고 편안한 장소로 항상 고정되어 있던 ‘가정’은 잠재적인 폭력과 위협과 범죄가 은밀하게 꿈틀대는 무대로 급부상했다. 달리 말하자면, 가정은 언제나 ‘그래왔던’ 곳이지만 이제야 비로소 ‘발견’되었다고 표현하는 편이 더 적절할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남자들끼리의 거친 몸싸움에 비하면 사소한 분쟁 정도로만 치부되어왔던, 여자들이 일상에서 혹은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서 불현듯 느끼는 어렴풋한 악의와 압박감은 최근에서야 실질적인 범죄의 전조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부탁 하나만 들어줘> 역시 <나를 찾아줘>의 자장 안에 속해 있다. 모두의 부러움을 받던 여인이 갑자기 실종되면서 이야기가 시작되고, 완벽한 겉모습 뒤에 숨겨졌던 어두운 과거는 사회가 여성에게 요구하는 온갖 조건들이 얼마나 숨 막히는 억압으로 작동하는지 다시 한 번 상기시킨다. 이를테면 <부탁 하나만 들어줘>의 에밀리와 스테파니는 ‘엄마의 자격’에 의해 양극으로 나뉜다. 에밀리는 유능한 직장인이자 매력적인 아내이지만 ‘나쁜 엄마’로 여겨진다. 회사 일 때문에 아이를 제때 픽업하러 오지 못하고, 학부모 활동에도 전혀 참석하지 않으며, 아이의 먹거리에 세심하게 신경 쓰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그는 아이가 잘 따라오는지 뒤돌아보며 아이에게 보조를 맞춰주는 엄마도 아니다. 스테파니는 정확히 그 대척점에 서 있기 때문에 ‘좋은 엄마’, ‘본받을 만한 엄마’로 묘사된다. 소위 사회에서 기대하는 ‘유일한 양육자’로서의 엄마의 역할을 얼마만큼 수행하느냐에 따라 그 인물 자체에 대한 타인의 평가가 결정된다. 이를테면 성실한 싱글맘(으로 여겨졌던) 스테파니가 그 아이의 출생에 관해 숨기는 미심쩍은 비밀이라든가, 아이보다 자신의 성공에만 열중한다고 은근히 비난받던 에밀리가 실질적으로 가족을 먹여살리는 가장으로서 그 가정을 지키기 위해 어떻게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질주해왔는가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알지 못한다.
하지만 길리언 플린의 소설이자 데이빗 핀처의 영화 <나를 찾아줘>가 대단히 냉소적인 블랙코미디였던 것에 비해, 폴 페이그의 <부탁 하나만 들어줘>는 영화 내내 삽입되는 프랑스 대중가요들의 발랄한 리듬에 어울리게 산뜻한 스타일로 진행되기 때문에, 가정 스릴러의 외면하고 싶은 진실을 좀 더 받아들일만한 무언가로 변화시킨다. 무엇보다 드라마 <가십걸>로 절정의 스타덤에 올랐던 블레이크 라이블리가 연기하는 캐릭터 에밀리는 관객을 압도한다. 2007년 당시 미국의 화려하고 흥청망청한 분위기를 아무 근심걱정 없이 담아내던 바로 그 드라마의 주인공이 12년 뒤 불황과 내 집 마련의 현실적인 벽 앞에서 허우적거리는 어른이 되었다고 생각한다면, 현실감이 배가되고 감정이입은 극대화된다. 배우 개인으로서도, <부탁 하나만 들어줘>라는 영화로서도 최고의 캐스팅이었다.

김용언 영화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