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_ 결혼과 인생(196) | 영화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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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과 인생(196) | 영화이야기


미성년


감독  김윤석
출연  염정아, 김소진, 김혜준, 박세진, 김윤석


영화의 제목이 화면에 뜰 때, 먼저 ‘성년’이라는 단어가 나오고 그 다음에야 맨 앞에 ‘미’자가 붙는다. 미성년, 성년이 아닌 자, 대한민국 민법상으로는 만 19세에 달하지 않은 자. 그러나 영화 <미성년>은 아주 직접적으로, 만 19세를 넘었는가, 아닌가 만이 성숙한 어른의 기준이 될 수 있는 건지 질문한다. 여기 등장하는 네 명의 어른(주리의 아빠와 엄마, 윤아의 엄마와 아빠(어릴 때부터 이미 떨어져 살고 있는 친부))과, 주리와 윤아라는 두 명의 고등학생이 보여주는 선택의 차이는 성숙함과 사려 깊음의 조건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생각케 한다.
같은 고등학교를 다니지만 아무런 접점도 없던 2학년 학생 주리(김혜준)와 윤아(박세진)가 학교 옥상에서 만난다. 주리의 아빠 대원(김윤석)과 윤아의 엄마 미희(김소진)가 남몰래 연애를 했고 그 결과 미희의 배가 눈에 띄게 불렀기 때문이다. 주리는 어떻게든 엄마 영주(염정아) 몰래 이 일을 수습하고 싶지만, 때마침 영주가 주리에게 전화를 걸고, 윤아는 그 핸드폰을 빼앗아 대원의 불륜을 폭로해버린다. 아무 말도 못 들었다는 듯 평온을 가장한 영주의 얼굴을 몰래 훔쳐보며 주리는 전전긍긍하고, 윤아는 대원에게 푹 빠져 있는 엄마 미희가 답답하기만 하다.
‘불륜’이라는 상황은 한국 대중문화에서 가장 사랑 받는(?) 콘텐츠다. TV의 각종 채널에선 일주일에도 수십 개의 드라마가 방영되는데, 그중에서 출생의 비밀과 불륜을 뺀다면 아예 이야기 전개가 안 되는 드라마가 태반이이며, 거기서도 대단히 익숙한 선악 대립이 펼쳐진다. 불륜을 저지르는 남자는 우유부단하고 딱하게 묘사하며, 대신 불륜의 상대자인 여성을 철저한 악녀로 그리는 것이다. 가정이 파탄난 책임은 어디까지나 ‘여자’에게만 있다는 시선. 판에 박힌 듯 똑같은 접근 앞에 매번 똑같은 응원과 화풀이의 댓글이 달리고, (가짜)화해의 클라이맥스 앞에서 다 같이 꾸며진 위안을 얻는다. 이 같은 대중문화를 통한 감정 해소가 어느 정도는 ‘예행연습’이라든가 감정 해소의 루틴이 될 순 있겠지만, 현실에서 무수하게 일어나는 각기 다른 상황들에 대처하는 성숙한 태도라곤 할 수 없다.
그런데 김윤석 감독의 데뷔작 <미성년>은 불륜을 완전히 다른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는 접근을 택했다. 영화가 시작되면 이미 불륜은 저질러졌고 그 관계는 여자의 임신이라는 결과 때문에 점점 파탄으로 치닫고 있다. 불륜의 주인공인 대원과 미희는 둘 다 이 관계 앞에서 어른스럽지 못하다. 대원은 미희의 배가 만삭에 가까워지고 있지만, 뱃속의 아이와 미희의 미래에 대해 그 어떤 확실한 언질도 준 적 없다. 하지만 욕먹는 건 싫기 때문에 미희에게 다정한 태도는 유지한다. 무책임한 남자와의 만남 때문에 스무 살에 덜컥 임신하여 윤아를 낳은 뒤 혼자서 아등바등 삶을 꾸려온 미희는, 대원이야말로 마지막 안식처가 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버리지 못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그 어떤 확실한 입장을 취하지 않은 채, 어떻게든 상황이 저절로 알아서 해결되겠지 라며 비루한 현실을 외면하는 모호한 상황. 비로소 상황을 파악하게 된 영주는 어떤 선택을 하는가. 영주는 남편의 기만(“넌 두 사람, 아니 네 사람을 기만한 거야.”)에 격분하지만, 이미 믿음을 잃게 된 남편 옆을 훌쩍 떠나는 것 역시 쉽지 않다. 지금 구입해서 살고 있는 아파트 값이 많이 올랐다면서 “전부 당신 덕분이야”라는 남편의 입에 발린 칭찬 앞에선 웃었지만, 정작 온갖 적금과 대출 통장들을 펼쳐 놓아보니 명의가 죄다 남편 이름이다. 집안일을 꾸려나가고 재산을 악착같이 불려나가며 세 식구의 미래를 위해 힘썼던 전업주부로서의 삶이, 결국엔 ‘남편’의 재산을 불려준 것에 지나지 않았다는 냉혹한 현실 앞에서, 영주는 망연하게 주저앉아 “미친년…”하고 스스로를 책망하게 된다.
혼외자식이 태어나는 상황 앞에서 당사자인 어른들이 우왕좌왕하고 책임회피와 자기모멸과 자기연민에만 빠져 있을 때, 주리와 윤아가 나선다. 아이가 태어났을 때, 그리고 부모가 이혼했을 때의 상황을 상상하며 아직 법적 미성년자인 자신들이 어디까지 행동할 수 있는지 정보를 찾고, 어른들에게 왜 당신들은 당신들의 마땅한 책임을 다하지 않느냐고 따져 물으며, 두 소녀는 서서히 미성년의 세계와 결별한다. 윤아와 주리가 정신적으로 성숙한다는 것뿐 아니라, 비겁한 어른들이 만들어놨던 기존 세계와 결별한다는 뜻이다. 그렇게 어른들은 퇴행하고, 아이들은 성장한다.  

김용언 영화 칼럼니스트